인터넷은 시민운동에 기회의 땅이 될 수 있다.

1. 우리는 희망의 새 고향,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왔노라.

인터넷은 시민운동단체에게 기회의 땅이다. 일찍이 EFF(Electronic Frontier Foundation)의 창립자인 존 페리 벨로우(John Perry Barlow)가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희망의 새 고향,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왔노라. 미래의 이름으로 너 과거의 망령에게 명하노니 우리를 건드리지 마라. 너희는 환영받지 못한다. 네게는 우리의 영토를 통치할 권한이 없다…….”

1996년 발표된 사이버독립선언문에서 존 페리 벨로우가 사이버스페이스를 희망의 새 고향이라고 말한 것은 그 동안 산업사회 정권들에 의해 억압받았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가 이 선언문을 작성하고 널리 배포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새로운 공간이 마련해준 그 자유마저도 기존의 권력에 의해 제약받을 가능성 또한 농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사이버스페이스 공간에 개입하지 말라! “… 우리 육체는 비록 너의 통치하에 있지만, 너의 통치권으로부터 독립적인 가상공간에서의우리 자신을 선언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 행성 위해서 펼쳐나갈 것이며, 그 누구도 우리 사고를 감금할 수 없다.”

2. 1996년의 한국, 그리고 2000년

1996년 한국의 상황을 돌이켜보자. 1996년 4월, 정당 및 정치인들은 PC통신을 통해 국회의원 출마자들의 연설문, 사진정보, 공약 등을 올려놓았다. 뿐만 아니라 일방적인 정보제공에서 탈피하여 PC통신 이용자들의 정치에 대한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는 도 개설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PC통신에 위법선거운동신고센터, 불법선거사례 접수 등의 코너를 신설하고 사이버 감시활동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전자민주주의의 시작이라고까지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정말 시작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PC통신에 올라오는 이용자들의 의견은 여론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여론은 고전적인 여론 주도층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정치인들도, 언론사도, 시민단체들도 PC통신 이용자들의 의견은 영향력이 크지 않은, 단지 참고할 만한 여론이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4년후, 2000년은 어떠했는가? 새천년 벽두부터 인터넷은 가히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한다. 2000년 1월에 시민사회단체들이 4.13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천-낙선운동을 벌이겠다고 발표하고, 대상자 명단을 총선시민연대 홈페이지에 올리자 인터넷은 가히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유권자들은 자기 지역구의 국회의원이 지난 시절 어떤 언행으로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언제, 어디서든지 볼 수 있었다. 이에 대한 찬반토론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물론 시민들은 오래간만에 ‘시민의 힘으로 정치인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기회’라며 대부분 찬성의사를 밝혔다. 이런 여론은 네트워크 공간을 타고, 총선시민연대 홈페이지에서 각종 포털사이트 토론방으로, 시민단체 자유게시판으로, 각 정당 홈페이지, 국회의원 홈페이지로 퍼져나간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시민의 의견은 곧 일반적인 여론이 되고, 이런 여론을 언론에 소개하고, 이는 곧 또다른 여론의 확대를 가져오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여론의 힘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후 논란이 되었던 총선시민연대의 낙선운동의 옳고 그름을 떠나 어쨌든 2000년의 경험은 인터넷의 위력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경제 분야에서의 디지털 혁명만을 보아왔던 우리는 정치분야에서의 디지털 혁명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보게 된 것이다. 심지어 프랑스의 권위지 ‘르 몽드’지도 2000년 4월 25일자에서 한국의 총선시민연대 활동을 “인터넷이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 발전에 촉매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3. 여론은 속도전이다. 인터넷은 소규모 시민단체에 더없이 좋은 기회

여론은 매우 복잡한 것이다. 각기 다른 의견들의 표출과 상호간의 경쟁을 통해 우위에 서는 의견이 일반적인 여론이 되지만 이게 말처럼 단순하지는 않다. 일단 여론은 속도의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밑바닥의 여론은 속도전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여론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언론은 과거 정부 관료와 정치인, 경제인, 학자들과 같은 오피니언 리더들의 의견을 전달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민심은 좀 과정되게 표현하다면 제주도를 거쳐, 광주를 거쳐, 대전을 거쳐,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힘이 부치고, 이미 민심이 목적지에 도달할 경우에는 때가 늦은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인터넷은 이런 속도로부터 민심을 해방시켜주었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여론은 PC방에서, 직장에서, 집에서도 중간과정 생략한채 바로 언론으로, 정부로, 기업으로, 정치권으로 전달될 수 있었다. 밤과 낮도 가리지 않는다.

시민운동에 있어 이런 상황은 기회임에 분명하다. 시민운동의 기본 역할 중의 하나는 민심을 올바르게, 신속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불과 3~4년 전만 해도 시민운동이 정책결정과정에 민심을 전달하는 통로는 언론이나 각종 토론회, 회의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이제는 거기에 더하여 이메일과 홈페이지를 활용하여 즉각적인 여론전달이 가능해졌다. 특히 사회적 지명도가 떨어지는 지역의 단체나 소규모 전문단체들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기회이다.

4. 정확한 여론의 직접 전달, 시민운동이 인터넷에서 해야 할 일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여론은 사라지지 않고 기록으로 남고 널리 퍼져간다. 이 또한 인터넷이 주는 가능성 중의 하나이다. 여론은 정확히 전달되어야 한다. 여론이 중간과정을 거치게 되면 때로는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여론이 왜곡될 가능성도 있다. 시민운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전통적인 언론을 섭외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단체가 하고 있는 일을 알릴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설령 어쩌다가 한번 언론을 통해 단체의 활동이 알려진다 하더라도 몇날 며칠 동안 심혈을 기울여서 작성한 수십쪽의 의견서가 단 한줄로 처리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인터넷은 이런 문제를 풀어줄 기회를 제공해줬다. 시민운동도 이제 언론을 거치지 않고, 직접 정부와 정치권, 기업들에게 이메일과 홈페이지 등을 통해 단체가 의도했던 보다 정확한 여론을 전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네트워크를 통해 통제력없이 흘러다니기 때문에 정보의 훼손 및 왜곡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터넷이 가져다 준 기회에 비해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5. 정보수집 능력의 향상이 시민운동을 한단계 발전시킨다.

1994년 세계적인 환경연구기관인 월드워치연구소는 ‘지구환경보고서 1994~1995’에서 “컴퓨터는 지구를 구할 것인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주내용은 “컴퓨터가 소비자경제를 자극해서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확대하는데 기여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라는 경고였지만 이들도 컴퓨터가 가지는 정보네트워킹 기능은 지구환경을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즉, 각종 환경문제 모니터링 활동에 네트워크상에 올려진 정보들을 이용하여 이를 DB화하여 분석한다면 이전보다 훨씬 정확하고 유용한 자료를 얻을 수 있어 환경운동을 한층 발전시킬 수 있고, 또한 시민운동가와 시민들로 하여금 지구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환경문제에 대한 보다 성찰적인 판단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월드워치연구소가 지적했듯이 이는 인터넷이 시민운동에 가져다주는 매우 중요한 변화 중의 하나이다. 정보의 빠른 수집과 분석능력의 향상은 시민운동의 정책적 기능을 향상시켜 줄 것이고, 이는 올바른 국가정책의 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그동안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접할 수 없었던 정보들에 대한 접근성을 높임으로써 시민의식의 향상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시민의식의 향상은 민주적 시민, 의식있는 시민에 대한 비율을 높여주고, 이는 시민운동의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다.

6. 세계 시민으로서의 연대의식 향상

시민운동이 관심을 가지는 영역은 다양하다. 기본적으로 자국 내의 정책결정에 시민의 입장을 대변하여 영향을 미치거나, 특정 지역의 시민들과 함께 지역의 공동체적 발전을 이루는게 시민운동의 역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화의 영향과 지구환경파괴에 대한 두려움은 시민운동의 관심 영역을 보다 세계적인 것으로 이동시켰다. 환경보호문제, 국제금융문제, 제3세계 인권문제 등은 이제 세계적인 시민단체들만의 관심사안이 아니다.

특히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세계적인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모두가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짐으로써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주의,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정부가 아닌 시민단체가 나서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고 있다. 이는 시민단체간의 연대를 요구했고, 90년대 중반 이후 시민단체간의 국제적 연대는 매우 일상화되었다.

이런 과정에 인터넷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메일을 통한 신속한 의사소통, 홈페이지를 통한 대대적인 홍보와 조직화 및 캠페인은 시민단체간의 국제연대를 한층 원활하게 가능하게 했고, 이는 2000년 들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반세계화운동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7. 100% 기회의 땅만은 아니다.

지금까지 인터넷이 시민운동에 미친 영향과 긍정적인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나 반드시 인터넷이 이런 긍정적인 영향만을 미친 것은 아니다. 인터넷은 그 자체로서 기능하고 있는 측면이 있지만 여전히 인간의 개입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인터넷이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측면에는 항상 부정적인 측면이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정보의 정확한 수집에 따른 올바른 여론의 형성이라는 인터넷의 긍정적 측면은 불명확한 정보의 수집으로 인한 잘못된 판단이라는 부정적 측면도 가져올 수 있다. 이는 중간에서 정보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려주는 단계 – 일종의 공신력있는 매체라는 – 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건전한 토론을 통한 시민의식의 향상이라는 기대감은 익명성을 바탕으로 한 무책임한 발언이나 언어폭력에 의해 무너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일부 부정적인 측면을 너무 부각시킬 필요는 없다. 그 어떤 시기보다도 시민의 발언력이 높이지고 있고, 일반 시민의 의견이 여론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인터넷은 높이 평가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일부 역기능을 이유로 아직 제대로 맛보지도 못한 전자민주주의의 싺을 미리 잘라 버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8. 인터넷을 활용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

인터넷이 전자민주주의에 대한 가능성을 현실화시키고, 올바른 여론을 형성하는 믿을 수 있는 매체가 되기 위해서는 시민들에게 정보의 전달, 수집, 판단에 대한 기본이해를 높이기 위한 교육분야에도 시민운동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또한 인터넷이 기회의 땅이라는 말은 산업사회에서는 만끽하지 못했던 자유를 확대시키고, 계층간의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시민운동 진영은 인터넷을 이용한 여론의 형성과 정책결정에의 개입, 궁극적으로 전자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여전히 소외돌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정보격차의 해소없이 인터넷은 기회의 땅을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터넷을 향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인터넷이 권력의 분권화와 참여민주주의를 증대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한층 더 강화된 중앙집권적인 권력강화 수단으로 변질될 개연성도 있는게 사실이다. 지식과 정보가 권력과 자본이 되는 이 시대에서 권력은 정보를 한 곳에 모으려고 하는 속성을 계속 비칠 것이다. 권력으로의 정보독점은 일상적인 감시를 낳고, 이는 민주주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한 결함으로 작용될 것이다. 따라서 산업사회의 권력이 네트워크상의 정보를 독점함으로써 정보사회에서까지 중앙집권적인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르게 해서는 안된다. 인터넷이 가져다준 희망과 기회만큼이나 인터넷이 시민운동에 가져다준 책임과 의무 또한 만만치 않다.

몇달전 인터넷과 시민운동의 관계라는 매우 어정쩡한 글을 부탁받고 쓴 글이다. 인터넷이 기회의 땅이다라고 말했지만 그건 인터넷과 시민운동과의 관계가 아주 좋았을 때의 이야기이다. 지금의 상황은 어떨까? 한마디로 표현하면 시민운동은 인터넷을 짝사랑하고 있다. 둘이 만나 찰떡궁합이 되기까지 건너야 할 산이 매우 많다고 생각한다. 그게 무얼까….. 계속 고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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