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의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사실.

2005년 5월에 쓰여진 글입니다.
메신저로 누가 읽어보라고 전달해줬습니다.
생각할게 많은 글인거 같아서 올립니다.

궁극적으로는 기업과 대학의 책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내용이 전달되고 공유되는 방식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며칠 전 동네에서 한 단체의 회원총회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달자와 전달받는 사람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자리는 아무리 좋은 이야기가 오고가도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하다는 사실….
정보만큼이나 그 정보가 전달되고 공유되는 방식도 엄청 중요하다는 사실….

소수의 엘리트가 나머지를 먹여살린다?
[해외리포트] MIT의 ‘오픈소스’ 학회와 한국의 기업정신
강인규(foucault) 기자   

http://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menu=c10100&no=223928&rel_no=2&index=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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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비드 레버도프의 저서 <비시민전쟁: 신엘리트가 파괴하는 민주주의>. 그는 이 책에서 엘리트주의가 민주사회에 어떤 해악을 끼쳐왔는지를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다.
ⓒ2005 Taylor T.

언어는 문화를 반영한다.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얻고 싶어하는 ‘엘리트’라는 호칭이 미국에서는 피해야 할 ‘낙인’으로 인식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04년 미대선 당시 케리 후보가 벗어 던지려고 안간힘을 쓰던 수식어가 바로 ‘엘리트’였다. 그리고 조지 부시는 ‘비엘리트’의 이미지를 강조함으로써 적지 않은 반사이익을 얻었다.

‘엘리트’라는 용어에 대한 대중들의 거부감은 시민혁명을 경험한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성이기도 하다. 현대 미국사회에서 이 단어는 대선후보의 표를 좌우하는 정도에 그치지만, 프랑스혁명 당시 ‘엘리트’는 단두대 앞에 서야 하는 ‘죄목’에 해당했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소수의 엘리트들이 독점하고 있던 권력을 국민들이 되찾아오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들이 ‘엘리트’라는 용어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아니,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국민들이 다스리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들 ‘위에’ 서 있는 자들이 누구란 말인가?

소수의 인재가 다수를 먹여살린다?

한국에서 ‘엘리트’라는 단어가 갖는 독특한 의미 못지 않게, 한국의 교육기관과 기업들 역시 다른 나라에서 보기 어려운 사회문화적 특성을 보여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수의 인재가 나머지를 먹여살린다’는 구호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구호지만, 사실 이 주장은 서구사회에서는 감히 입 밖에 내놓을 수 없는 ‘무엄한’ 말이다.

무엇보다 이 주장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수의 평범한 시민들로 구성된 사회는 ‘인재’들이 속한 학교와 기업이 이끌고 먹여살릴 ‘밥벌레 집단’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삶을 가능케 해주는 터전이다. 한 사회의 평범한 시민들은 그 ‘인재’들이 속한 교육기관에 물적, 인적 토대를 제공하고, 그들이 일하는 기업에서 생산되는 물건을 사주고, 투자하며 끊임없이 아이디어와 노동력을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엘리트’를 먹여살리는 셈이다. ‘누가 누구를 먹여 살리는가’의 문제는 단순한 수사학의 차원이 아니다. 이는 한 사회에서 기업과 학교가 져야 할 책임을 규정하는 대단히 중요한 논의이기 때문이다. 기업과 대학이 사회 없이 존속할 수 없다면 ‘사회환원’은 ‘자선행위’가 아니라 마땅히 되돌려 주어야 할 빚을 갚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시민들이 한 달만 물건을 사주지 않아도 도산할 기업들이 도리어 ‘국민들을 먹여살린다’고 주장하거나, 지역사회의 도움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교육기관들이 지역주민들을 이방인 취급해 오지 않았던가. 감사의 주체와 대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로부터 사회적 책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모두가 초대받은 ‘오픈 소스’ 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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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캠브리지의 찰스강을 끼고 있는 매사추세츠공대 전경.
ⓒ2005 강인규

매사추세츠공대에서 지난 주 열렸던 국제 커뮤니케이션 포럼( MIT Communications Forum)은 그런 면에서 아주 주목할 만한 행사였다. 비교미디어학과(Comparative Media Studies)가 주최한 이번 학회는 “테크놀로지가 문학적 이야기구성(Narrative)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다소 독특한 주제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내용 못지 않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학회의 형식이었다.

대개의 학회는 논문이 통과되었다는 소식과 더불어 등록비 청구서를 함께 보내오는 것이 보통이다. 학회 등록비는 몇 십 불에서 몇 백 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이번 MIT 커뮤니케이션 포럼 안내문에는 등록비용에 대한 내용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그 대신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있었다.

“학회의 제반 일정은 지역민들을 포함한 모든 분들에게 열려있습니다.”

편지는 학회일정 기간에 머물 수 있는 모든 숙소들을 호텔로부터 값싼 유스호스텔에 이르기까지 빠짐 없이 소개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관심 있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참가비나 숙박비 부담 없이 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 ‘오픈 소스’ 형식의 학회는 대단히 인상적이었지만, ‘테크놀로지와 이야기구성’이라는 주제가 얼마나 많은 시민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 하는 회의는 끝내 버리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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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사추세츠공대 미디어포럼은 모든 시민에게 개방된 ‘오픈 소스’ 방식을 택했다. 사진은 포럼이 열렸던 미디어랩의 내부 모습.
ⓒ2005 강인규

그러나 이런 회의는 학회장에 도착하는 즉시 사라졌다. 객석을 3분의 1 이상 채운 사람들이 학계와 상관 없는 일반시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작가,’ ‘게임개발업자,’ 혹은 ‘평범한 시민’으로 소개한 이들은 프로그램이 끝날 때마다 열정적으로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했으며, 그동안 쌓여있던 ‘먹물들’에 대한 비판도 빼놓지 않았다.

매사추세츠공대와 미디어랩측이 여러 면에서 시민들을 배려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도서관을 일반에게 개방하는 것은 물론, 간단한 등록절차를 거치면 누구나 무선인터넷을 쓸 수 있도록 해 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연회에 초대받은 것은 물론이다.

학회가 끝났을 때 가장 크게 감사한 사람들은 오히려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시민들과의 만남을 통해 많은 것을 듣고 배웠으며, 또 자신들이 사회에서 해야 할 역할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는 소중한 기회를 얻었다고 거듭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면서 비록 재원마련에 어려움을 겪더라도 이 ‘오픈 소스방식’을 고수해 주기를 바란다고 조심스럽게 당부했다.

‘평범 속에 뿌리내린 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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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임총장 취임식을 알리는 안내휘장. “평범속의 비범”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2005 강인규

이번 학회가 아니더라도 매사추세츠공대는 독특한 문화를 지닌 학교로 잘 알려져 있다. 많은 사립대와 달리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분방함이 그렇거니와, 어느 학교보다 지역사회와의 결속과 연대를 강조하는 점에서도 그렇다. 캠퍼스 곳곳에 신임 여총장의 취임을 알리기 위해 설치된 휘장의 표어가 이 정신을 잘 드러내 준다.

“평범 속에 뿌리내린 비범(Uncommon in Common)”

평범한 사람들과 스스로를 구분짓기 위해 애쓰는 한국의 엘리트 교육과는 달리, 이 표어는 사회 속에서 학교와 기업이 갖추어야 할 책임과 자세를 일깨워 준다. 어떤 기업이나 학교도 사회를 떠나 허공 속에 존재할 수 없으며, 그들이 가진 재능이라는 것 역시 평범한 시민들 개개인이 가진 능력보다 상위의 것도 아니다. 다만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수학문제 하나를 더 잘 풀거나 외국어 하나를 더 하는 것이 곡식을 제때에 길러내거나 신발을 멋지게 꿰매는 능력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 식탁에 놓인 밥과 우리 발을 덮고 있는 구두가 주머니 속에 든 최신형 휴대폰 못지 않게 중요하다면 말이다. 결국 ‘엘리트주의’란 수평적 차이를 수직적 위계로 착각하는 오류이자, 감사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감사를 요구하는 무례함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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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포럼을 주최한 비교미디어학과의 학과장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 팬문화 연구로 잘 알려져 있다.
ⓒ2005 강인규

이번 미디어 포럼의 핵심적 관점 가운데 하나는 생산과 소비의 관계를 일방적인 수혜의 과정이 아닌 ‘순환’의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이었다. 기업이 제품을 생산해 시장에 내놓을 때 이를 구매하는 소비자는 금전적 대가만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제품에 대한 ‘이야기,’ 즉 의미와 아이디어를 동시에 기업에게 제공한다. 그리고 그 의미와 아이디어는 이후 기업의 생산과 판매에 핵심적인 자산으로 기능한다.

대표적인 예로 한국의 정보통신산업을 들 수 있다. 세계시장에서 각광받고 있는 한국의 정보통신기기의 성공은 기업의 꾸준한 연구개발 못지 않게 평범한 한국국민들에게 빚지고 있다. 한국국민만큼 적극적으로 신기술제품을 사주고, 써주고 평가해 주는 소비자들도 없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나 선마이크로시스템과 같은 정보기술업체가 앞다투어 한국에 연구소를 세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은 기업의 신기술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국민이라는 인적 인프라를 활용하기 위해서 한국에 진출하는 것이다. 미국 일간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앞선 기술을 능동적으로 채택하고 까다롭게 평가해 주는 소비자들 덕분에 한국시장이 정보통신산업의 미래를 들여다볼 수 있는 ‘타임머신’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진단하고 있다.

“미국 실리콘 벨리의 정보통신 업체들은 상대적으로 낙후된 자국의 광대역 환경에 불만을 품은 채 한국으로 몰려들고 있다. 자신들의 기술을 한국 소비자라는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시험관들에게 검증받기 위해서이다. 미국의 정보통신업계는 한국시장을 미래의 미국시장을 내다보기 위한 일종의 ‘타임머신’으로 간주하고 있다. 한국의 대형전자업체인 삼성은 신제품을 한국소비자들에게 먼저 선보여 6~8개월간 써보게 한 뒤 반응을 살펴 문제점을 해결한 후 세계시장에 내 놓는다.” –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한국이 바로 미래다,” 2005.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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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랩 연구소장인 월터 벤더가 미디어 생산과 소비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2005 강인규

미국의 학교와 기업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를 위해 적극적으로 베풀고 헌신하는 것은 그들이 더 관대한 마음을 지녀서가 아니다. 그들 자신들이야말로 사회의 가장 큰 수혜자임을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고귀한 ‘희생의 정신’이 아니라, 자신이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얼마 전 한국에서 ‘일류 엘리트론’으로 유명한 한 기업총수가 철학 명예박사를 받으려다 학생들의 제지를 받은 사건이 있었다. 이 기업이 여러 학교에 기부금을 내고 있는 것은 분명히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 ‘사회환원’은 어디까지나 ‘자선’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진 빚에 대한 ‘보은’의 차원이어야 한다.

삼성의 기부행위가 감사받을 만하다면, 십여년 전 더 나은 품질의 소니와 아이와를 마다하고 별 세개 로고가 찍힌 ‘마이마이’를 사 주었던 한국 소비자들의 ‘기부행위’ 역시 감사받아야 마땅하다. 당시 그 중소업체의 물건을 애국심만으로 써주고 아낌없이 조언함으로써 세계적 기업으로 키워 준 것이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국민들이야 말로 그 기업을 ‘먹여살린’ 은인이 아닐 수 없다.

정보의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사실.”에 대한 답글 7개

Add yours

  1. MIT 미디어랩. 사실 앨리트 중에서도 최고의 앨리트들인데. 한국의 앨리트들과는 태도가 사뭇 다르네요. ㅋ

    1. 학자는 끊임없이 배우고 자신이 배운 것을 남들과 공유하는게 사회적 역할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하는데… 왠지 우리나라의 앨리트들은 배움과 공유의 가치 보다 가르치는 것에 너무 전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문화, 스스로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생각이 저런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생각드네요.

  2. 오~~ 이거 전에 읽은적 있는데…
    삼성8000억 문제와 맞물려서 나왔던 글이었던으로 기억되네요…

    “‘사회환원’은 어디까지나 ‘자선’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진 빚에 대한 ‘보은’의 차원이어야 한다.”
    이거 참 맞는 말 같습니다…특히나 우리나라 대기업에는요.

  3. MIT와 같은 세계적인 대학이 엄청나게 존재하고…
    위글처럼 실제적으로도 앞서가는 인재와 문화도 가진 역량있는 미국이라는 나라…
    그리고 민주주의도 첨단을 달린다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로마나 대영제국처럼 지속가능하지 못할 “제국”을 꿈꾸고 그렇게 나아가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참 아이러니합니다.

  4. 오랜만에 전율이 느껴지는 글이네요. 정말 다수의 사람들이 이와같은 평범한 진리를 알고 깨닫길 기원합니다.

    1. 와우.. 전율까지…. ^^
      흔히 지방대학이라고 하는 곳이 지역사회와 어떤 관계를 가질 것이냐는 것도 대학의 정체성과 관련된 중요한 의제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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