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시민운동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반 시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국어사전에는 시민운동을 시민의 입장에서 행하여지는 정치/사회운동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민운동의 범주는 워낙 다양하여 이 단순한 정의가 정확하지는 않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입장이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그렇게 보고 있다. (시민운동, 인권운동, 환경운동, 풀뿌리운동, 여성운동, 문화운동 등 앞에 붙이는 말에 따라 운동의 의미는 확연히 달라질 수 있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 모든걸 시민운동이라 인식하고 있고, 주요 언론을 통해 소개되는 대표적인 몇몇 시민운동단체의 모습으로 전체를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어째튼 시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방식의 시민운동은 이제 점점 그 역할이 줄어들고 있다. 우선 블로그라는 뉴미디어의 예를 통해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아래의 이야기는 2007년 비즈니스 블로그 서밋 행사에서 당시 TNC의 대표였던 노정석님의 이야기가 모티브다.)
개인의 힘을 확대시켜준 블로그
얼마 전까지만 해도 – 10년 정도? – 콘텐츠의 생산은 우리가 소위 이야기하는 전문가들의 몫이었다. 전문 사진작가, 칼럼니스트, 학자, 기자, 영화감독 등등. 우리는 그런 전문가들이 만들어준 콘텐츠를 소비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몇년 전부터 이런 콘텐츠 생산을 용이하게 해주는 디지털 카메라, 캠코더, 블로그 솔루션 등이 속속 등장하면서 이제는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는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개방형 전문가들이 등장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누구나가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은 콘텐츠의 양이 그만큼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하고, 콘텐츠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중요해진 일이 바로 콘텐츠를 분류해주고, 검색해주는 일이 되었다.

이렇게 많은 콘텐츠 속에서 살아남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위해서는 콘텐츠에 매력적인 요소가 있어야 한다. 매력적인 요소라는 것은 재미와는 다른 것인데 매력은 사람을 잡아 끄는 힘으로서 일종의 공감지수와 맥을 같이 한다. 콘텐츠에 매력이 있다는 것, 이것은 곧 그 콘텐츠 생산자가 일정 정도 브랜드 파워를 지니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말한다.
시대는 특정 기업이나 상품 혹은 단체 등에게만 브랜드 파워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도 충분히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 일등 공신은 개인 미디어라고 하는 블로그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열거하지 않아도 최근 2-3년 이내에 블로그를 통해 자신만의 독자적인 브랜드를 만들어낸 많은 블로거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내가 곧 미디어다.
내가 보이게 블로그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이것이다. 이제 더이상 전통적인 미디어에 의존하지 않고 내가 곧 미디어임을 증명했다는 점. 이 안에는 더 이상 나를 대변해줄 필요도 없고, 대변해주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본다.
세상은 오래 전부터 변하기 시작했고, 미디어가 가지고 있던 권력은 분산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나의 입장을 대변해주지 않아도 내가 내 목소리를 대중을 향해 직접 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변이 필요한 상황이 있고, 권력은 특정 미디어에 편중되어 있다. 하지만 흐름은 이렇게 가고 있다고 보는게 맞을 것 같다.)
다시 시민운동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시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시민운동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 공간과 블로그라는 개인 미디어이다. 이 현상은 갈수록 강화될 것이다.
이제까지 시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운동이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일종의 희소성도 큰 작용을 했다. 시민단체 말고는 누구도 시민의 입장을 대변해주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입장을 드러내놓고 발표하고, 여론화시키지 못했다. 더군다나 평범한 시민들은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전달할 수 있는 미디어 도구를 소유하고 있지 못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능력이 필요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처음 시민단체에서 일을 할 때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이 성명서와 논평, 보도자료를 작성하는 일이었던 기억이 난다. 성명서, 논평, 보도자료에서 가장 중요한 컨셉은 시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시민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었다.
며칠동안 정부나 기업에서 발표한 자료나 정보공개청구를 한 자료들을 분석하여 정책 보도자료를 작성한 후 언론사에 팩스로 보내면 거의 대부분의 언론사들이 그 자료를 인용하여 기사화했다. 보도자료를 받아서 쓸 뿐만 아니라 설명을 요청하는 전화가 오고, 방송사에서 취재가 올 정도였으니까. 나름 알려진 단체의 영향력 때문이었을지 모르지만 열에 아홉은 그런 식으로 기사화가 되었고, 그건 곧 단체의 영향력을 파악하는 지표가 되었고, 실제 언론을 통해 전달된 내용들은 정책에 반영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몇년 후 그런 일과 무관한 다른 일들을 하게 되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발표했던 자료들은 지금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보면 누구든지 분석하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였던 것 같다. 그 내용을 폄하하는게 아니라 결국은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이 단체에 속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취합하여 공익이라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작성했던 것인데 개인의 능력이 아주 특출나거나 아주 독특한 견해가 묻어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 누구든 시간만 내고, 주변 전문가들의 도움만 받으면 작성할 수 있었던게 아닐까…. (물론 어떤 이슈를 어떤 관점을 관찰하고 분석하느냐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아무나 할 수 있는건 아니지만.. 보통의 사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뭐…)

그 당시만 해도 – 그게 10년도 채 안되는 시간이다. – 개인들은 언론과 접촉할 통로도,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할 매체도 없었기 때문에 단체의 그런 역할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변화는 금새 찾아왔다. 시민단체의 희소성과 대체불가능했던 능력이 점점 개인들이 할 수 있는 역할로 대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읽어볼만한 글
………그동안 시민운동은 지나치게 시민을 대변하는 입장에서 활동해 왔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시민들 스스로 시민운동이 지향하는 좋은 가치들(예를 들면 평등, 생태, 평화, 인권, 풀뿌리민주주의 등)에 동의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을 하는 것이다. 한국 시민 운동은 이런 측면에 약했다. 한편 지금 필요한 조직화의 방향은 ‘이해관계에 기반한 조직화’가 아니라 ‘가치(비전)에 기반한 조직화’가 되어야 한다. 이해관계에 기반해서 사람들을 조직화하는 방식은 이해관계가 소멸되면 곧바로 방향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것보다는 ‘좋은 사회’에 대한 꿈을 가지고 시민들과 같이 고민하고 실천을 조직해야 한다. 이제는 시민운동이 더 이상 시민들을 대표하거나 대변하려 하지 말자. 시민들을 대변하는 척 하면서 중립적 심판자를 자처하지도 말자. 누구도 시민운동에게 그런 역할을 위임한 적은 없다. 시민운동은 그냥 시민운동이 지향하는 가치를 표방하고, 그런 가치에 동의하는 시민들과 함께 노력하면 된다. 그리고 시민들의 목소리가 조직되고 현실에서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안내하고 지지-지원하는 역할을 하면 된다……… 출처 : 사회변화를 성취하는 시민운동을
“(2) 시민운동 : 대변(代辯)하는 운동에 대해서”에 대한 9 댓글
대변하는 운동에서 함께 서는 운동으로
해결해주는 지도자가 아닌, 입장을 같이 하는 친구로써
이런 모습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ㅎ
대변하는 운동에서 함께 서는 운동으로
해결해주는 지도자가 아닌, 입장을 같이 하는 친구
이 말씀 참 좋네요.
기억해둡니다.~
학생운동을 마치고 환경운동에 처음 뛰어들 당시 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환경단체의 정책실에서 반상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학교를 다닐 때부터 그 단체를 오고가며, 그 곳에서 일하고 있…
요즘 조직재편과 관련해 고민을 전개하면서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던 중 발견한 몇 편의 글들에서 공감가는 부분이 참 많네요…
성명서와 언론, 그리고 단체 영향력은 단체에서 일을 해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시민운동의 한계(극복지점)”이 아닐까 합니다.. 마침 비슷한 생각을 적은 글이 하나 있어 트랙백을 겁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비밀글입니다. : )
“이는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개병형) 전문가들이 등장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
개방형의 오기인가요?
사전을 찾아봐도 나오지 않아서리..;;;
개방형이겠죠. ^^ 제가 오타를 좀 많이 내는 편입니다. ~
여전히 블로그는 그 미디어로서의 역사적인 함의와 잠재력을 피어내지 못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블로그가 상대적으로 누구나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매체인 것은 맞지만, 또 자신의 작은 목소리를 웹이라는 공간 속에서 나누고, 퍼뜨리기에 아주 경제적인 매체인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ㄱ. 기술(포털로 상징되는 왜곡된 유통시스템) ㄴ. 문화(오프라인과 온라인을 이분화시키는 관습) ㄷ. 제도(억압장치로서의 법제도와 공권력, 행정작용들)의 차원에서 블로그를 둘러싼 환경은 적대적이죠. 그 미디어 잠재력을 ‘온순한 마케팅의 이중대’로만 제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모색과 실천이 절실한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길게 보면 분명 미디어 권력이 이동하는 흐름이 맞긴 한데 그 권력이 누구에게로 가느냐는 물음표입니다. 새롭게 변신한 기존 미디어 매체들의 차지가 될 수도 있으르거구요.. (어려운 문제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