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시민운동 : 중립과 객관이라는 프레임

예전에 시민운동을 하면서 외부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의 하나가 언제나 중립성을 지키고, 객관성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이 말은 조중동과 같은 보수언론 뿐만 아니라 시민운동 내부에서도 자주 강조되는 말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시민운동에 대한 하나의 프레임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시민운동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다’는 것이 아니라 시민운동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프레임에 가두어두고 여기에서 벗어나면 시민운동의 순수성을 상실했다느니 정치편향적이라는 말로 공격하는 것이다.

객관과 중립이라는 프레임

이 문제가 크게 논란이 된 적이 있는데 그때가 2000년이었다. 총선시민연대가 대대적인 낙천/낙선운동을 벌일 때였다. 낙천/낙선운동의 결과 – 꼭 그것만이 원인은 아니었지만 – 총선시민연대가 지목한 정치인들이 줄줄이 떨어졌는데 이때서부터 그동안 시민운동에 매우 우호적이었던 보수언론들이 일제히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999년 무렵인가 중앙일보에는 매주 한차례씩 NGO특집이 실렸던 기억이 있다. 또  중앙일보 시민사회연구소가 생긴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들은 왜 “세상을 바꾸는 NGO”라고 칭찬해마지않던 시민단체들을 비판하기 시작했을까?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낙천/낙선운동을 통해 시민운동의 파워를 실감하게 된 보수언론들은 그 파워가 자신들의 힘을 능가하고, 결국에 그 힘이 자신들에게로 향하게 될 것을 직감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보수 언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꽤나 영리한 선택이었던 듯 하다. 문제는 이런 객관성과 중립성이라는 프레임이 시민사회 내부에서도 광범위하게 작동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나도 이 문제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다. 당시만 해도 시민운동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

이런 문제가 가장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지하철과 버스처럼 시민의 일상 생활과 직접 연관되는 사업장에서 파업이 발생할 때이다. 당시의 자료들을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이런 경우 보통 사측(정부)의 잘못을 지적하고, 성실한 교섭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노조측에도 시민들의 불편을 생각하여 극단적인 파업은 자제해야 한다는 입장이 나온다. 중간자적 입장에서 중재를 하고, 시민의 입장을 빌린 판단들이 합리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이런 입장들이 시민단체 스스로 중립과 객관의 프레임에 자신을 가두게 되고, 이 프레임을 벗고 변화를 모색해야 할 때 오히려 이것이 족쇄로 작용한다.

지금은 우익인사라고 하지만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개혁적인 인사라고 평가받던 서경석 목사가 특히 낙선/낙천 운동에 대해 비판적이었는데 그의 비판 논리의 핵심은 바로 객관성과 중립성을 상실하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시민운동이 합리적 대안 모색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기보다는 한편에 치우친 문제 제기에 더 힘을 쏟았고 이로 인해 갈등 조정자가 아닌 갈등 촉발자로 국민에게 비쳐지게 되었다…..(중략)….예를 들어 지난 낙선낙천운동 때는 법 위에 군림하면서 스스로 판관이 되어 정의의 잣대를 독점했다.” – (2005년 3월 13일, 국민일보)

하지만 나는 반대로 이러한 논리가 그동안 시민운동을 시민들로부터 멀어지게 한 원인 중 하나가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최근에 강하게 들고 있다. 중간지대에서 서서 이쪽도 나쁘고 저쪽도 나쁘고 우리만이 합리적이라는 자세,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기 보다는 조정하려는 자세가 시민들의 참여를 가로막고, 시민들을 계몽의 대상, 조정해주어야 할 대상으로 보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미디어 환경이 객관과 중립을 요구하지 않는다.

무엇이 중립이고, 무엇이 객관인가? 온전한 객관이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세상의 모든 것이 관계 맺지 않는 것이 없는데 자기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제3자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거나 생각하는 것이 운동하는 사람이 지켜야 할 타당한 가치인가? 중립은 또 무엇인가?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처신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이 문제 또한 최근의 미디어 환경과 결부지어 이야기해보고 싶다.

지금 시대는 개인의 주관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시대이다. 앞선 글에서 이야기한대로 개인의 콘텐츠 생산이 늘어난다는 것은 곧 개인의 주관들이 광범위하게 유포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개인의 주관을 드러낼 수 있는 도구가 없었을 때는 객관과 중립이라는 사고가 세상을 보는 하나의 방법이었기 때문에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시대가 변한 지금은 객관과 중립의 자세는 매력적이지도 못할 뿐더러 자신의 주관적 견해를 자유롭게 밝히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공감을 얻지도 못한다.
 
블로그가 대안적 미디어로 자라잡아 가고 있으니 시민단체들도 블로그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왜 시민단체의 블로그에 올라오는 글들 대부분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할까? 물론 서서히 블로고스피어 내에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으며, 끊임없이 이슈를 만들어내는 단체의 블로그도 있지만 실패하는 단체의 블로그와 성공하는 단체의 블로그 차이는 무엇일까? (그 원인 중 하나는 앞 글에서 밝힌대로 개인들의 콘텐츠가 시민단체들의 콘텐츠를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쓰는 방식이 인터넷 시대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것도 하나의 원인일 수는 있다.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없지만 제발 단체들이 아래아한글에서 써놓은 성명서나 논평을 그대로 복사해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블로그에 붙여넣기하는 일 좀 안했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 있다.) 그 외에 또 한가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시민단체가 쓰는 블로그의 글에 객관과 중립으로 “포장된 주관”이 많기 때문이다. 포장되었기 때문에 솔직해보이지 않는다. 독자들로 하여금 감정 이입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주관이 폭발하는 시대, 선포되는 진실이 아니라 완성되어가는 진실이 진짜다.

단체가 블로그를 통해 어떤 이슈에 관한 입장을 “충분히” 드러낸다고 하는 것은 해당 이슈에 대한 전후맥락을 충분히 설명하고, 왜 그러한 입장이 나오게 될 수밖에 없었고, 이 입장이 나오기까지 어떤 내부 과정을 거쳤는지를 설명하는 과정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오직 “입장”만 존재할 뿐이다.

이렇게 결과만 공표하는 방식은 더 이상 신뢰를 얻을 수 없다. 결과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입장을 발표했다는 사실 보다는 왜 그 입장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가에 관한 설명이 필요한 시대가 지금이다.

기존 미디어, 특히 신문과 방송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객관과 중립을 강조하는 미디어는 사실을 전달하기에 바쁠 뿐 그 뒤에 숨겨진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기에는 벅차다. 아니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는 언론사들이 현재의 미디어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전통적인 형식을 갖춘 기사는 변화된 미디어 환경에 어울리지 않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실을 전달하는 일이 예전에는 의미있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팩트는 기자들이 전달하지 않아도 이미 인터넷에 존재한다. 인터넷에 접속해 있으면 누구든지 사실에 접근할 수 있는 시대인데 단순한 사실 전달이 기사로서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검색하면 다 나올만한 정보를 전달하는 일은 이제 언론사의 기자나 시민단체가 해야 할 역할이 아니다. 어떤 사실을 아는 통로는 이미 트위터와 같은 소셜미디어에도 있고, 아고라와 같은 광장미디어에도 있고, 블로그와 같은 개인 미디어에도 있다. 

객관과 중립이 틀린게 아니라 도달하는 방식이 달라져야

그렇다면 객관과 중립이라는 가치는 이제 폐기해야한다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객관과 중립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자고 하는 이야기에서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객관과 중립에 도달하는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뉴미디어 속성과 집단 지성의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수많은 주관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검증을 거치면서 객관에 도달하는 과정에 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논증형 주관 저널리즘은 블로그의 미래”라는 몽양부활님의 글에도 잘 설명되어 있으니 꼭 읽어보기를 바란다.)

누군가에 의해 선포되는 진실이 아니라 완성되어가는 진실이 진짜 진실이다. 객관과 중립의 탈을 쓴 계몽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대중의 검증을 용납하는 열린 주관의 힘이 필요한 시대이다.

앞서 말한 매력적인 콘텐츠라는 것은 형식적인 객관을 유지하는 콘텐츠가 아니라 검증을 용납하고, 대중과 함께 진화할 가능성이 있는 콘텐츠를 말한다. 객관과 중립이라는 것에는 대중이 끼어들 여지를 용납하지 않고, 함께 진화해나갈 가능성을 차단한다. 그래서 지금의 시대에는 객관과 중립이라는 가치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해보자는거 아닐까?

민주주의는 원래 굉장히 불편하고 귀찮은 일이다.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검증받고, 토론하고, 합의점을 찾아내고, 승복할 줄 알고, 함께 새로운 가치를 만든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 누군가가 만들어주는 것들은 그 토대가 취약할 수밖에 없다. 우리 지금 그걸 겪고 있지 않은가? 어느 정도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이제 정부가 알아서 편하게 살게 해주기만을 바라는 우리들의 이기심도 이렇게 민주주의의 토대를 약하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이다.

민주주의는 완성되어가는 것이고, 대중의 관심과 개입을 먹고 자라는 것인데 우리 너무 무관심했던 것이다. 민주주의가 원래 불편하다는 것을 알고, 민주주의가 그런 불편함을 기꺼히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깨닫고, 다른 사람의 인권 침해가 언젠가 나에게도 올 수 있다고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면 지금의 이런 암흑과 같은 시대도 충분히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계속 : 시민운동의 관심가져야 할 지점)

(3) 시민운동 : 중립과 객관이라는 프레임”에 대한 답글 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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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빛의 속도로 논의를 진행해주고 계시군요.
    일단 통독했습니다. : )

    저도 어서 따라잡아야할텐데 말이죠.
    주말 약속이 겹쳐있어서..;;;
    가급적 빨리 우선순위로 조아신님의 논의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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