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출판전문잡지 <기획회의>에서 잡지 속의 잡지 <비욘드 로컬>을 계간으로 내고 있다. <비욘드 로컬> 창간호에 워케이션을 주제로 쓴 글이다.
지리산에서 워크스테이를 시작하기까지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지리산 자락의 작은 시골 마을, 남원시 산내면이다. 서울을 떠나 이곳에 정착한 지 어느덧 20년이 넘었다. 이곳을 선택한 여러 가지 이유 중 절반은 지리산 때문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90년대 말부터 귀농·귀촌인들이 모이기 시작하며 대안적인 삶과 일의 문화가 형성되고 있는 지역이라는 점이 작용했다.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는 나에게는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관도 중요했는데, 이곳이 그런 면을 충족시켜 줄 거라고 기대했다.
사는 곳은 시골이었지만 일은 서울에 있는 단체에 소속되어 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버스를 네 시간 타고 서울에 가서 며칠 일하고 내려왔기 때문에 완전한 재택근무는 아니었다. 그래도 업무 방식은 꽤 자유로웠다. 머리가 복잡한 날에는 마을에 있는 절까지 한 시간 정도 산책을 다녀오면 금세 괜찮아졌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하는 습관이 몸에 쌓여가다보니 장소와 상관없이 전세계 어디서든 일하는 디지털 노마드의 삶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중간에 일 때문에 제주도에서 3년을 살기도 했다. 제주에서는 집이 아니라 Daum 제주센터에서 일을 했다. Daum 직원은 아니었지만 재단 소속으로 IT개발자, 기획자들과 한 공간에서 일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낯선 공간에서 그동안 비영리 영역에서 만나왔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결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자연스럽게 일에 대한 생각도 확장되었다. 도시의 빌딩 속 닫힌 사무실과 회의실이 아닌, 한라산이 보이는 제주센터의 카페, 잔디밭, 휴게실 등이 혁신적인 서비스 아이디어가 탄생한 공간이었다는 개발자들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해되었다.
지리산과 제주, 서울을 오가며 깨달은 것은 장소와 공간이 삶과 일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었다. 제주도에서의 3년간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와서 인구 2,000명 남짓 되는 이 시골 마을에 영리와 비영리가 공존하는 카페를 열었다. 2012년 10월이었다. ‘지리산에서 즐거운 실험’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그곳의 이름은 ‘토닥’. 커피와 음료를 판매하지만, 사실 그곳은 좋은 경험을 공유하고, 새로운 관계를 촉진하고, 또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는 공간이었다.
카페는 지리산을 찾은 사람들이 잠시 머물며 일하는 공간이 되기도 했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이야기 나누는 사랑방이기도 했다. 혼자 온 사람에게는 책방이었고, 내게는 손님이 없는 틈을 타 일을 하는 사무 공간이었다. 카페 안에서는 워크숍, 강연회, 공연, 책 모임, 영화 상영 등 사람들이 생각을 나누고 서로를 연결하는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졌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마을 사람들과 우리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도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새로운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카페라는 공간을 만들 때 구상과 경험을 바탕으로 지리산권 5개 지역을 연결해보자는 생각으로 ‘지리산이음’이라는 단체를 창립했다. 지리산권 5개 지역의 사람들을 연결하고, 도시와 시골을 이어주는 활동을 하던 중 공매로 나온 농협 창고를 단체 명의로 무작정 구입했다. 카페라는 공간에서 발견한 가능성을 더 확장하고 싶었고, 더 넓은 공간에서 더 많은 실험을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지금의 ‘작은변화베이스캠프 들썩’이 만들어졌다. 들썩은 지리산권을 넘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작은 변화를 만들어가는 이들을 연결하고, 그 변화가 모여 더 큰 흐름을 만들도록 돕는 커뮤니티 공간이다.
비영리 활동가를 대상으로 한 지리산 워크스테이

이 공간은 처음부터 전국 각지에서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 모여 연결되고 확장되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기획했다. 비영리 활동가들이 언제든지 와서 일할 수 있는 공유 오피스도 마련했다. 공유오피스 가운데에는 아주 크고 멋진 원목 테이블을 놓았다. 공유 오피스에 앉아 밖을 보면 멀리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
지리산 워크스테이는 지리산이음이 전국의 비영리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지원한 프로그램이다. ‘일과 휴식을 병행한다’는 뜻의 워케이션(workation)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단순한 휴식보다는 장소와 공간을 바꿔 머물면서 일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고 싶어서 워크스테이(workstay)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지리산이음이 진행한 워크스테이의 목적은 기존의 워케이션과는 조금 달랐다. 지역 관광·경제 활성화나 생활 인구 증가와는 전혀 무관했다. 세상의 변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에게 낯선 장소와 공간에서 일과 휴식 경험을 제공하고 싶다는 단순한 취지에서 시작했다. 그래서 평소와는 다른 환경에서 일과 휴식을 병행하며 에너지를 충전하고,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협력의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지리산 워크스테이는 비영리 활동가 지원 프로그램이었지만 우리가 한 일은 프로그램 운영이 아니었다. 사실 프로그램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우리는 참가자들이 쉬고, 일하고, 지역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환경, 공간, 정보를 제공했다. 참가자들은 첫 날 마을과 공간, 단체에 대한 소개를 받고, 숙소와 식당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함께 온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것을 제안했지 그 외의 시간은 온전히 각자의 선택에 맡겼다. 지원금은 숙박비와 식사비를 포함하여 지역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5일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환경, 공간, 정보, 관계를 제공했다.
지리산 워크스테이에 참가한 비영리활동가들의 후기 안에 워케이션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여기에 몇 사람의 말을 소개하고 싶다. 지리산 워크스테이에 참여한 활동가는 “지쳐 있는 사람에게 휴식이 필요하듯, 늘 같은 일을 반복하면 그것이 곧 한계라고 느껴진다. 하지만 환경을 바꾸면 단순한 발상의 전환을 넘어 일상의 전환까지 가능해진다.”고 했다. 한 청소년 활동가는 “공간이 바뀌니 생각이 조용해졌다. 사무실을 오가며 사람들을 만나고 관여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 여기서는 그런 것들이 사라졌다. 온전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하는 나를 발견했다. 일보다 사람이 먼저 보였다.”고 했다. 현장에서 늘 버거운 일정을 소화하던 한 인권 활동가는 “주변이 어둑어둑해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지리산 공기를 마시고, 햇살의 따스함을 느끼기 위해 집중해서 일을 끝냈다. 아침 출근길의 풍경이 정말 끝내줬다. 흔들리는 나무와 바람에 부서지는 햇살을 바라보다가 지각하는 일… 지금 생각해도 너무 낭만적이다!”라고 했다.
지리산을 벗어나 태국 치앙마이로 떠난 워케이션

두 번째는 우리 스스로 해외로 워케이션을 다녀온 이야기다. 지리산이음은 워케이션의 새로운 가능성과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 장소와 공간을 바꿔 일하는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2024년 1월, 지리산이음은 지리산을 벗어나 태국 북부 치앙마이에서 워케이션을 진행하기로 했다. 왜 하필 치앙마이일까?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이는 워케이션에 적합한 일반적인 지역 조건과도 일치한다.
첫째, 치앙마이의 1월은 한국, 특히 지리산의 추운 겨울과는 완전히 다른 따뜻한 날씨를 자랑한다. 치앙마이의 1월 평균 기온은 23~28도를 유지한다. 둘째, 치앙마이는 전 세계 디지털 노마드들의 성지라 불릴 만큼 안정적인 인터넷 환경을 갖추고 있다. 호텔, 카페, 식당 어디를 가도 무선 와이파이가 제공되어 어느 곳에서나 일하기 쉽다. 게다가 여러 명이 함께 회의하고 일할 수 있는 공유 오피스도 곳곳에 마련되어 있다. 셋째, 비영리 활동가들이 부담 없이 오래 머물 수 있을 만큼 생활비가 저렴하다. 하루 숙박비는 1인당 2만 원 정도면 괜찮은 호텔에 머물 수 있고, 한 끼 식사는 5,000원 이내로 해결할 수 있다. 넷째, 무엇보다 다양한 문화와 가치가 공존하는 지역이라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곳곳에 카페와 음식점이 즐비하고, 매일 열리는 로컬 시장과 주말 야시장, 매일 저녁 펼쳐지는 라이브 음악과 조용한 사원들이 공존하는 곳이 바로 치앙마이다. 또한, 택시를 타고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도이스텝, 도이 인타논 국립공원, 빠이 등 자연 속에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곳들도 많다.
이런 낯선 환경에서 18명이 모여 2주 동안 함께 지내며 각자의 일을 하는 워케이션 자체가 하나의 실험이자 목적이었다. 치앙마이에 사람들과 함께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꽤 오래전부터였다. 오래 전에 일부 IT 기업들이 매년 1월에 전 직원이 치앙마이에 가서 한 달 동안 일하면서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기사를 보고 비영리단체 활동가들과도 언젠가는 함께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또 필리핀에 있었던 NGO학교를 다녀온 선배의 경험담도 영향을 주었다. 2000년대 초반, 한국의 시민운동가들은 필리핀에 있는 NGO학교에서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 동안 공부하며 머무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곳에서 맺어진 관계가 이후 시민운동을 하면서 엄청난 지지와 응원의 네트워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한 두번 들은게 아니었다. 그래서 비록 3개월까지는 아니지만, 단 2주만이라도 그런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2024년 1월에 치앙마이 워케이션에 함께한 사람들은 ‘지리산이음’과 협력 관계를 개별적으로 유지해 온 사람들이었다. 다만, 서로 간의 관계는 깊지 않았다. 2주간의 프로그램은 단순했다. 2주 동안 5번의 전체 모임을 갖고, 나머지 시간은 각자 계획을 세워 자유롭게 보내기로 했다. 물론 숙소는 같은 곳을 정해 아침저녁으로 자연스럽게 마주칠 수 있도록 했다.
누군가는 한국과 두 시간 시차가 나는 치앙마이의 호텔 수영장 옆에서 매일 아침 화상 회의를 했고, 누군가는 완전히 쉬기로 마음먹고 매일 아침 산에 올랐다. 때로는 혼자, 때로는 즉흥적으로 동행하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고, 점차 새로운 차원의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에는 낯설었던 관계가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관계로 변해갔다. 지리산이음과 개별 인연이 있던 18개의 연결선이 서로 이어지면서 18명의 관계망으로 발전한 것이다.
2024년 치앙마이 워케이션을 다녀온 후, 참가자 중 한 명은 이 프로그램을 자신이 속한 조직의 공식적인 활동가 지원 프로그램으로 발전시켰다. 그 결과, 2025년 1월에 그 조직은 비영리 리더 12명과 함께 2주간의 ‘치앙마이 리더십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나도 운영자로 동행해 작년의 경험을 공유했다. 그 시기에 맞춰 지리산이음도 새로운 참가자 12명을 모아 다시 한 번 치앙마이 워케이션을 진행했다. 두 그룹은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다른 숙소에서 머물렀지만 두 번의 공식 모임과 여러 차례의 비공식 모임을 통해 자연스럽게 교류했다.
2년간의 치앙마이 워케이션을 통해 40명의 관계망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네트워크가 아니다. 신뢰의 관계망, 응원과 호혜의 관계망이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같은 고민을 안고 살아가던 한국의 비영리 활동가들이 해외의 낯선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느끼는 반가움과 연대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런 관계망이 더 많이, 더 자주 생겨나야 한다. 회의실과 행사장이 아닌, 일상과는 다른 낯선 장소에서 사람들을 만났을 때 우리는 일 너머에 있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워케이션이 이러한 신뢰의 관계망을 만들어가는 시간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의미 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다양한 관점과 방식의 워케이션
요즘 전국적으로 워크케이션이 유행하고 있다. 특히 많은 지자체가 지역 관광과 경제를 활성화하고 생활 인구를 늘리기 위한 방법으로 워케이션을 적극 활용하며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지자체는 워케이션을 경험한 사람들의 변화와 관계보다는 그들이 머무르는 시간과 참여자 수에 집중한다. 이는 머무르는 시간과 참여자 수가 곧 예산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워케이션을 통해 기대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며칠 동안 다른 지역에서 일하고 오라’거나 ‘충전해서 돌아가라’는 것이 아니다. 낯선 공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각자가 돌아간 조직에서도 일과 휴식을 조화롭게 병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 그리고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난 낯선 장소와 공간이 창조와 혁신의 원천임을 인식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워케이션의 가치다.
워케이션은 일하는 장소와 방식의 변화를 통해 일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혼자만 참여하는 것보다 함께 오는 것을 추천한다. 2년간 지리산 워크스테이를 운영하며 우리는 이런 상상을 해봤다. 전혀 다른 분야에서, 완전히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한 그룹을 이루어 워케이션을 온다면?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협력할 수 있는 환경과 공간을 제공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또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한자리에 초대한다면? 그들의 고민은 비슷할 것이고 서로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워케이션이 단순히 일과 휴식의 조화를 이루는 것을 넘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지속적인 협력의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기회의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워케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연결이 가능한 시대에 평소와는 다른 장소와 공간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함께 일하며 관계를 맺는 새로운 소통 방식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기획한 워케이션에 참여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스스로 워케이션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경험을 쌓는 것도 중요하다. 치앙마이 워케이션을 통해 우리는 치앙마이 곳곳에서 경험한 모든 공간에 대한 추억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 그 사람들과 만나면 여전히 치앙마이에서 함께 갔던 식당, 술집, 사원, 산책길, 소품점, 야시장 이야기를 나눈다. 그 장소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는 다음에도 또 치앙마이에 가자고 이야기한다. 사실 세상에 정해진 워케이션 장소와 공간은 없다. 일과 휴식의 새로운 경험과 추억이 있는 곳, 그리고 함께한 사람들이 떠오르는 곳이 곧 좋은 워케이션 지역이다.
세상의 좋은 변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모인 비영리 생태계에서 중요한 것은 네트워크다. 그리고 네트워크의 핵심은 신뢰다. 하지만 신뢰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오직 일만 존재하는 회의실에서가 아니라 온전한 개인으로 만나야 신뢰가 훨씬 더 잘 싹튼다. 비영리 생태계에서 다양한 방식의 워케이션이 기획되고 시도되면 좋겠다. 꼭 워케이션이 아니더라도, 또 해외가 아니더라도, 비영리 생태계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낯선 장소와 공간으로 떠나는 시도를 더 많이 했으면 한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신뢰의 관계망이 건강한 비영리 생태계를 조성하고, 결국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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